오치아이 히로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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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前 야구선수. 前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단장.
영광의 선수시절과 동시에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징크스를 깨고 감독으로도 상당한 실적을 남긴 인물. 그러면서 '오레류(オレ流)',[10] 좀 의역하면 '내 맘대로'라는 성격으로 대표되는, 일반인의 상식을 넘은 독특한 자신만의 스타일로 도무지 종잡기 힘든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 최초의 연봉 1억엔 돌파자였고, 2억엔 및 3억엔의 최초 돌파자이기도 했다.[11]
여러가지 의미로 일본 내에서는 호불호가 꽤나 극명하게 갈리며, 한국의 야구 팬들 사이에서도 당시 라이벌 팀이던 요미우리의 감독 '덕장' 스타일의 하라 타츠노리에 비해 그리 호감 이미지는 아니었다.
2001년 일본 웹 사이트에서 실시한 '20세기 베스트 나인'에서 2루수로 선정된 바 있다. 여기에는 뒷 이야기가 있는데, 1루수에는 오 사다하루가, 3루수에는 나가시마 시게오가 있기 때문에 실력이고 뭐고 인지도와 인기로는 도저히 저 두 포지션에는 선정될 수가 없어, 팬들이 2루수로 활동했던 이력이 있으니 2루에라도 오치아이를 선정해야 겠다는 움직임을 보이며 대량 투표하여 2루수였던 로버트 로즈 - 타카기 모리미치[12] 가 뽑히지 못했다.
2. 선수 시절[편집]
2.1. 아마 시절[편집]
그 당시 지역에서는 제법 강호로 알려진 아키타 공고 재학 중이었지만 연습이 싫다라는 이유로 야구부에 들어갔다가 탈퇴. 그럼에도 오치아이가 중학교 때부터 워낙 실력이 뛰어났던지라 대회만 있으면 부원들이 사정사정 해서 정식부원도 아닌 그를 4번에 세웠다고 한다. 참고로 영화광인 오치아이를 부원들이 돈을 모아 구한 영화티켓으로 낚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대학시절도 에피소드의 연속. 도요 대학에 입단한 오치아이는 당시까지 선후배 간에 상명하복이 확실한 대학 야구부의 전통이 맘에 안 든다고 학교 째 때려 치우고 그냥 귀경해 버렸다고 한다. 이후 볼링에 흥미를 가져 볼링 프로 시험까지 볼 계획으로 프로테스트를 신청했으나, 그 기간 중 속도위반으로 딱지를 떼는 바람에 벌금을 내고나니 수험료가 없어서 프로볼링 테스트도 좌절. 이후 고교시절 은사의 추천으로 사회인 야구단인 도시바 후추(東芝府中)에[13] 선수 겸 사원으로 입사하여 다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나가시마 시게오의 엄청난 팬으로 어렸을 때부터 동경하고 있었으며, 1974년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마지막 경기 겸 나가시마의 은퇴 경기에도 회사에 휴가를 내고 관람을 하였다고 한다.
2.2. 롯데 오리온즈 시절[편집]
입단 당시. 그의
1978년 사회인 야구대회에서 맹활약하며 프로 스카우트들의 눈에 띈 오치아이는 그해 드래프트에서 롯데 오리온즈에 3순위로 지명되며 우여곡절 끝에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15]
(좌측부터 오치아이 - 부머 - 바스)
최전성기이던 85년의 모습. 부머 웰즈[16] , 랜디 바스 등 외국인 타자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던 유일의 일본인 타자였다.
입단 당시 카네다 마사이치의 뒤를 이어 롯데 감독으로 온 야마우치 카즈히로[17] 는 극렬 레벨스윙 주의자였기에, 오치아이가 당시에 가지고 있던 어퍼스윙[18] 을 교정해 보겠다고 오치아이에게 달라붙었다...만 줄창 자기 스타일만 고집하는 통에 두손 두발 들고 포기.(...) 입단 1년차의 햇병아리 주제에 '저는 감독님의 방법을 이해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19] 그냥 '자기 스타일+옆에 있는 다른 선수'의 타격폼 따라 하기로 독자적인 타격폼을 만들었다. 누가 봐도 어딘가 모르게 엉성하기 그지없는 오치아이의 타격폼이었으나 공 하나는 정말 잘 맞추었다.
오치아이의 트레이드 마크인 신주타법(神主打法)
이 특이한 타격폼을 두고 코치들이 말이 많았는데, 마침 왕년의 안타 제조기이자 롯데에서 선수생활의 말년을 보내고 있던 장훈 선생이 오치아이의 타격 모습을 보고는 "저 정도 스윙이면 충분히 잘 칠 수 있어"라고 거들어 줬다. 이에 코치들도 전혀 태클을 걸지 않고 기술적인 부분만 서포트하는 정도로 끝냈다고 한다. 참고로 같은 오치아이의 타격폼을 두고 야마우치의 전임 감독이었던 카네다 마사이치는 대놓고 저건 아마추어나 하는 스윙이다라고 디스했는데, 이게 오치아이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는지 이후에 다른 OB 선수들의 이름을 말할 때 당연히 연장자의 예우로 '상(さん)'을 붙였는데 카네다만 이름 뒤에 '상'을 안 붙였다는 얘기도 있다.
입단 2년차인 1980년 시즌 후반기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 승격하여 주전으로 도약하기 시작한 오치아이는 이듬 해인 1981년에 수위타자(타격왕)에 오르고, 1982년 시즌에는 당시 NPB 사상 최연소인 28세의 나이로[21] 타격 3관왕을 달성하여 퍼시픽리그 MVP를 수상하며 단번에 퍼시픽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부상하게 된다. 다만, 당시 기록이 타율 0.325, 32홈런, 99타점이란 저조한 기록이었던 탓에 평론가들이 간신히 달성한 기록이라며 3관왕의 가치를 깎아내렸다고 한다.[22] 이에 발끈한 오치아이는 3년 뒤인 1985년, 타율 0.367, 52홈런, 146타점 이란 압도적인 성적으로 3관왕을 획득한 뒤 간접적으로 '이래도 내가 영양가가 없냐?'라는 식으로 어필했다는 듯 하다. 홈런 수가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은 볼 아랫 부분을 깎아치고 스핀을 걸어 비거리를 늘리는 법을 익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치아이는 배팅 머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하는 타격 연습으로도 유명했다.[23][24]
명성이 올라가면서 오치아이의 독특한 스타일도 회자 되기 시작했고, 그러한 개성에 끌리는 사람들은 엄청 좋아했지만, 노선을 따로 타는 '삐딱선' 이미지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비난을 사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대놓고 훈련을 안한다고 하기도 했고[25] 오픈전 (KBO의 시범 경기)에서는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 변화가 있다고 했으니 오늘은 공만 보고 휘두르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고 2삼진을 먹은 바 있다. 이 때도 특이한 짓[26] 한다고 욕 먹었는데 시즌 끝나고 보니 3번째 타격 3관왕을...
그러나 통산 3번째 삼관왕을 수상한 1986년, 평소 오치아이의 특이한 성격을 이해하고 감싸주던 이나오 카즈히사 감독이 1986년 시즌 종료 후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자 롯데의 중심 타자였던 오치아이가 직접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하는 파격적인 일이 벌어졌고, 결국 주니치와의 트레이드가 성사되며 롯데에서의 선수생활을 끝마치게 된다. 이 건에 관해선 오치아이가 후일 밝히길, 후임 감독이었던 아리토 미치요[27] 가 서로 사이가 안 좋았던 자신을 트레이드로 방출시키는 것을 감독 취임 조건으로 내건 것도 이적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2.3.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편집]
이후 주니치에서도 꾸준한 페이스를 보이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주니치 드래곤즈의 홈구장이었던 나고야 구장이 롯데 오리온즈의 홈구장인 카와사키 구장보다 약간 넓은 탓에 주니치 시절 오치아이의 홈런 수는 전체적으로 다소 줄기는 했지만, 1993년 시즌을 제외하곤 매년 20홈런 이상은 찍었고 홈런왕과 타점왕을 각각 2회씩 차지했다.
1989년 116타점으로 센트럴리그 타점왕을 차지하였는데, 양대리그에서 타점왕을 기록한 선수는 오치아이가 처음이었다. 1990년엔 34홈런으로 역시 사상 첫 양대리그 홈런왕을 차지한 데 이어[29] , 시즌 종료 후 구단이 제시한 연봉에 불복하고 일본인 선수로는 최초로 연봉 조정을 신청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91년 시즌 최후반까지 타격 삼관왕을 노릴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지만, 결국 타격왕은 야쿠르트의 후루타 아츠야에게 불과 3모 차이(후루타 0.3398, 오치아이 0.3395)로 아쉽게 내주고[30] 타점은 후루타의 팀메이트 히로사와 카츠미에 8타점 부족하여 2위에 그치며 홈런왕(37개)만 손에 넣은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1993년에는 개인통산 400홈런을 달성하였다. 또한 같은 해 5월 7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경기에서 입단 2년차 신인 우도 가쓰야를 상대로 솔로 홈런을 치며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초 양대리그 200홈런 기록을 달성했다.
이 시기에도 매년 목표를 '타격 3관왕'으로 하였고, 동계 기간 첫 개인 훈련의 스타트 시간을 '새벽 3시 33분 33초'로 잡은 적도 있다.
한편으로 주니치 소속이던 1991년 일본에서 개최된 제1회 한일 슈퍼게임의 일본 대표로 출전하여 한국 투수들의 관광 가이드로 맹활약 하기도(...)
하나 덧붙이자면, 주니치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으로 뛴 경기장이 한국의 잠실야구장이다. 1993년 11월, 한일 친선경기 참가를 위해 방한해서 뛴 경기이다.[33]
2.4.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편집]
이후 FA제도가 처음 도입된 1993년 오프시즌에 마츠나가 히로미 등과 함께 최초로 FA를 선언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이 때 입단 인터뷰에서 "나가시마 감독을 헹가래 쳐드리러 왔다."고 했는데 아래에 서술되어 있듯이, 진짜 이적 첫 해인 1994년 나가시마의 기대에 보답하듯이 본인의 호언장담대로 우승을 실현시켰다.
요미우리에서는 3년 동안 붙박이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34] 팀을 센트럴리그 2회 우승으로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
1994년엔 상대 투수들의 집요한 인사이드 공격에 왠만한 데드볼에는 성질 부리지 않았던 오치아이도 배트를 바닥에 내려 치며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고,
붙었다 하면 왕창 깨지던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일본 시리즈[36] 에서는 1, 4차전은 패했으나 2~3, 5~6차전을 연달아 승리하며 오치아이 선수 인생 최초이자 마지막인 일본 시리즈 챔피언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물론 오치아이는 사타구니 부상으로 거의 활약이 없었으나(3타수 1안타 1사구)[37] 어찌 되었건 그가 없었으면 아예 일본 시리즈 무대 자체에 오를 수 없었기에 '성공적인 FA 영입'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95년에 2천안타 달성, 96년에 500홈런, 1500타점을 기록하고 이 해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등[38] 현역시절 이룬 마일스톤의 대부분을 요미우리 시절에 달성했다.
2.5. 닛폰햄 파이터즈 시절[편집]
그러나 96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오치아이의 지위를 위협할 정도로 막강한 인기를 자랑한 당시의 대스타이던 키요하라 카즈히로를 영입한 것에 대해 반발하여 구단에 자유계약을 신청하여 퇴단하게 된다. 이후 닛폰햄 파이터즈의 연봉 3억엔, 2년 계약을 제안받아 닛폰햄으로 이적하게 된다.[39]
요미우리를 퇴단하는 이유에 대해 본인은 와타나베 츠네오 오너,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과 가족들이 함께하는 이례적인 퇴단 기자회견에서 "어릴 적부터 존경해온 나가시마 감독님이 (포지션이 겹치는 문제 때문에) 자신과 키요하라 중 누구를 기용할 것인가 고뇌하는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스스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그러나 닛폰햄에서는 나이에 따른 노쇠화도 있고, 설상가상으로 전년도에 입은 왼손목 부상이 장타력의 하락으로 연결된 것인지 홈런 수마저 급감하면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입단 첫 해인 1997년 시즌에는 5월 중순까지 3할3푼대의 높은 타율을 기록했지만, 이후 부상과 노쇠화로 점차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부상까지 겹치면서 결국 시즌 최종성적은 타율 .262/OPS .680, 3홈런 43타점 이란, 나이를 감안해도 이름값과 연봉을 생각하면 너무나 좋지 못한 성적에 그쳤다. 한편으로 이해 5월 28일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전에서 와카타베 켄이치[40] 를 상대로 안타를 쳐내며 오스기 카츠오 이래 사상 2번째인 양대리그 1000안타를 달성했다.
이듬해인 1998년 시즌엔 초반에 잠시 3할 타율을 기록했으나 이후 타율이 2할대로 떨어짐과 동시에 4번타자 자리를 빼앗겼고, 신예 선수들의 대두까지 겹치면서 주전에서 밀려나 출장 기회가 크게 줄었다. 결국 타율 .235/OPS .652, 2홈런 18타점이란 시즌 성적을 끝으로 이해 시즌 종료 후 자유계약 신분으로 방출되면서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오치아이의 현역 마지막 경기는 시즌 최종전이었던 1998년 10월 7일의 대 치바 롯데 마린즈 원정경기 더블헤더 2차전(치바 마린 스타디움)이었는데, 쿠로키 토모히로를 상대로 대타로 나서 1루 땅볼로 물러났고 이것이 현역 마지막 타석이 되었다. 경기 당일 우에다 토시하루 감독이 오치아이에게 선발 출장을 제안해 왔으나 오치아이는 "대타로 시작한 프로 인생은 대타로 마무리짓고 싶다."라는 의향을 밝히면서 거절했고, 그렇게 평소 조용히 은퇴하고 싶다고 밝혀온 본인의 의지대로 현역 생활을 마무리지었다.
통산 성적은 7627타수 2371안타, 타율 0.311, 510홈런, 1564타점, 1135삼진, 1475사사구. 이것이 대학과 사회인 야구를 거치면서 방황하다가 남들은 프로에서 8~9년 경력이 쌓이고 전성기를 맞이할 27세라는 늦은 나이에 데뷔한 늦깎이 선수의 통산 성적이다. 오치아이가 얼마나 자기관리에 철저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스탯이라 할 수 있다.
유니폼을 벗은 이후 오치아이는 주니치 감독이 되기 전까지 야구 해설가로 활동 했는데, 특유의 입담으로 해설하는 통에 이 시기에 그의 진정한 오레류 스타일이 일본 야구팬들에게 각인되었다고.
3. 감독 시절[편집]
2003년 시즌 오프, 주니치 드래곤즈의 감독 선임 요청을 받아들여 2004년부터 2011년까지 8년 동안 주니치 드래곤즈의 중흥기를 이끌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업적을 이루어냈다.[41]
감독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놈의 오레류가 발동되는데, 감독이 되고 처음 한 일이 유니폼 디자인을 바꾸는 것이었다. 요미우리의 10연패를 저지했던 1974년 우승 당시의 유니폼 디자인을 모티브로 삼았는데[42] , 디자인 자체는 74유니폼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당시의 하늘색, 빨간색을 복구시키는 것이 아닌, 1987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제휴 이래 확립되어온 메인 컬러인 파란색과 흰색이 어우러지는 디자인으로 재구성했다.
또한 스프링 캠프 첫 날 '팀 청백전'을 치뤘는데, 일반적으로 러닝과 가벼운 운동으로 시작했던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가을 마무리 훈련에 나타나서 '대외비'를 전제로 스프링 캠프 첫 날 청백전을 선언, 선수들의 분발을 촉구한 것이었다.[43] 그리고, 통상적으로 5일 훈련 - 1일 휴식이었던 방식을 6일 훈련 - 1일 휴식으로 바꾸었고, 투수 연습 마운드를 일반적인 4~5인용에서 10인용으로 확장시켜 투수들 간에 보이지 않는 자극을 주었다.
그리고 시즌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그만의 특이한 선수기용이 빛나기 시작했다.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절에는 사와무라상을 수상하는 등 정상급 투수였으나 2001년 FA로 주니치에 온 뒤에는 어깨 부상 때문에 무려 3년 간이나 1군 등판이 없었던 카와사키 켄지로를 개막전 선발 투수로 지명한 것. 일본프로야구에서 개막전 선발 투수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매우 파격적인 기용이었는데, 3년간 실적이 전혀 없었던 투수를 한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경기에 선발로 내보낸 것에 대해 경기 초반 (오치아이 특유의 오레류에 아주 질색해 왔던) 일부 평론가들은 "야구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아닌가 싶네요"라는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44]
그리고 평론가들의 생각이 맞은 건지... 카와사키는 2회도 못 넘기고 상대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붉은 헬멧 타선에 맹공을 당해 강판당했으나, "3년간 부상으로 고생만 한 선수에게 패배를 안길 수 없다"라는 야수들의 분투 속에 히로시마의 에이스 쿠로다 히로키를 무너뜨리며 대역전극을 거둔다.[45]
감독 첫 해인 2004년 개막 초반엔 5할 전후에 머무르며 잠시 최하위까지 겪는 등 순위가 오락가락하는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였으나,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키스톤 콤비 중 하나로 손꼽히는 당시의 테이블 세터였던 1번 이바타 히로카즈 - 2번 아라키 마사히로, 일명 아라이바의 타순을 반대로 바꾸면서 오히려 팀 분위기가 전환되었고, 6월 이후로는 단 한번도 리그 1위를 빼앗기지 않는 완벽한 경기력 속에 주니치의 5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우승의 가장 큰 이유는 카와카미 켄신, 야마모토 마사, 이와세 히토키 등이 중심이 된 강력한 투수진과 상술한 아라이바를 주축으로 한 나고야 돔의 드넓은 그라운드에 최적화된 리그 최강급 수비진으로, 부임 당시만 해도 타격 3관왕 출신답게 나고야 구장 시절을 연상케 하는 공격력 중심의 팀컬러로 회귀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으나 오히려 호시노 센이치 감독 재취임 이후 나고야 돔으로 홈구장을 바꾸면서 새롭게 변모한 기동력, 수비 중심의 팀컬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이후 주니치의 최전성기를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 다만 같은 해 일본시리즈에선 1988년 이래 16년 만에 맞붙은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3승 4패로 아쉽게 우승을 내줬다.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강타자 타이론 우즈를 영입한 후 2연패를 노린 2005년에는 5월 초까진 1위를 달리다 이후 실속하면서 한신 타이거스에게 1위 자리를 빼앗겼고, 이후 재차 추격하면서 한때 0.5게임차까지 쫓았으나 시즌 후반에 중요한 승부처에서 연패를 당해 승차가 도리어 벌어지면서 끝내 한신 타이거스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고 2위로 시즌을 마쳤다. 오치아이가 재임하던 8년 간 주니치는 딱 1번을 빼곤 매년 가을야구에 진출했는데, 그 1번이 바로 이 때. 당시엔 아직 센트럴리그에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도입되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2006년엔 2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 뒤이어 2007년에는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2위로 진출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꺾고[46] 일본시리즈에 올라, 전년도 일본시리즈에서 자신들에게 1승 4패의 패배를 안긴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를 상대로 똑같은 스코어로 역으로 되갚으며 53년 만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뤄내는 최고의 결과를 이뤄내며 명장으로 칭송 받았다.
주니치 감독 시절의 선수기용은 보통 상식을 뛰어넘는 기행에 가까운 게 많았는데, 마운드에 뻔히 좌완 투수가 올라와 있고 대타요원에 우타자들이 빼곡한데 굳이 대타로 좌타자를 내보낸다던가, 반대로 계투를 내보낼 때도 상대가 주포급 좌타자라 누가 봐도 "아 원 포인트 릴리프로 좌완 투수가 나오겠군"하는데 다음날 선발 예정인 우완 투수를 내보낸다던가 하는 일이 꽤나 있었다. 거기에 타선 구성에서도 수비력을 중시한다고는 하지만 멘도사 라인에 걸치는 극도의 수비형 야수를 1번 타자로 기용한다던가 하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신기한 건 그런 희한한 기용이 이상하게도 잘 맞아 떨어졌다는 점.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당시 4번타자이자 팀의 주포인 타이론 우즈를 1번에 둘까도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수 기용을 잘 들여다보면 나름 철저하게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방향으로 하고 있다는 게 중론.
감독을 맡은 2004년부터 2011년 까지 4번의 센트럴리그 제패, 5번의 일본시리즈 진출, 1번의 일본시리즈 제패[47] 등 감독으로의 업적도 대단한 편.
한국에는 능구렁이로 많이 알려져 있었는데 당시 주니치의 경기를 보면, 오치아이는 경기 내내 시종일관 같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보통 심판에게 항의하러 나오는 감독들은 대개 (오심이든 아니든) 불리한 판정에 흥분해서 뛰쳐나오는 게 보통인데 오치아이 감독이 이런 상황이 오면 마치 "허허 심판양반 그건 좀 아니지 않소?"라는 표정으로 허허실실 대며 걸어 나와서 30분 넘게 실실 쪼개면서 일관된 표정으로 항의하기도 한다. 보통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때 까지 항의하는 스타일의 감독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보통사람은 아닌 듯. 그리고 그렇게 푸근한 미소로 항의하다가 끝끝내 항의가 안 받아들여지면 지킬박사와 하이드마냥 표정이 싹 바뀌며 "야! 다들 들어와!"라고 외치며 선수단을 덕아웃으로 철수시키는 예능감까지 발휘했었다.[48] 이것 때문에 심판이 화들짝 놀란 것이 보일 정도.
참고로 일본야구는 5분이상 항의하면 지연행위로 퇴장처분을 내리는데, 오치아이는 2011년 8월 9일부로 감독력 8년 중에 6번이나 퇴장을 당했으며 이는 카네다 마사이치, 호시노 센이치와 함께 역대 감독 퇴장횟수 공동 2위.[49] 이렇게 퇴장을 많이 당했으나 그 중 대다수는[50] 순전히 판정에 납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지연행위를 벌여 퇴장당했다.
이렇듯 매년마다 좋은 성적을 올렸음에도 2011년 시즌 후반에 주니치 드래곤즈의 감독 자리에서 퇴임하는 것이 발표되었는데, 이전부터 오치아이 특유의 '오레류' 스타일에 불만을 가져왔던 구단 프런트 내부의 오치아이 반대파가 구단 수익이 매년마다 저하되는 것을 오치아이가 구단 수익에 큰 영향을 미치는 지역 기업과의 밀착이나 팬서비스를 소홀히 하면서 지역 팬심이 구단에서 멀어진 것이 원인[51] 이라고 오치아이에게 책임을 돌려 감독에서 물러나도록 하기 위해 오치아이 찬성파를 쫓아내며 프런트를 완전히 장악하거나 주주총회에서 오치아이의 악평을 퍼뜨리는 등 끊임없이 반대 여론을 조성하며 몰아붙인 끝에 결국 퇴임이 결정된 것이었다.
오치아이는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으나 "현장을 맡고 있는 건 나니까 멋대로 발표하지 말라"라고 요청했는데도 불구하고 막장 프런트에서 이를 무시하고 시즌이 한창 진행되는 중임에도 퇴임 발표를 대대적으로 때린 것. 당시 반대파의 수장이었던 주니치 구단 사장 사카이 카츠히코가 팀이 역전을 당하자 오히려 (오치아이를 퇴임시킬 명분이 생겨서) 환호했다는 카더라까지 퍼지면서 엄청나게 논란이 일었다. 그만큼 현장 관련해서 언터쳐블이였던 오치아이를 반대파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밀어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던 것으로 당시 주니치 구단은 언론사 모기업인 주니치 신문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사 신문과 계열사 언론매체로 오치아이를 엄청나게 디스했으나 정작 다른 언론사들에 의해 당연하지만 매년 꾸준히 성적을 내왔던 오치아이에게 우호적인 보도가 이어지면서, 감독을 지켜야 할 모기업이 감독을 극딜하고 다른 언론이 오히려 감독을 옹호하는 기막힌 광경이 펼쳐졌다(...)
이러한 오치아이 반대파의 노골적인 오치아이 밀어내기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불렀는데, 이 해 시즌 내내 중위권을 전전하던 주니치가 오치아이의 퇴임 발표 이후 오히려 감독님에게 마지막으로 우승을 안겨주자는 선수단의 단결 아래 시즌 막판에 연전연승을 거듭한 끝에 야쿠르트를 제치며 극적으로 사상 첫 센트럴리그 연패까지 이뤄내면서 오치아이를 그렇게나 밀어내고 싶었던 반대파들이 한가득이었던 프런트는 오히려 망신살을 탔고, 우승 이후 오치아이가 반대파 수장이었던 구단 사장과의 악수를 대놓고 쌩까거나 축승회에서 맥주 세레머니가 벌어질 때 구단 사장이 선수단에게 따돌림당해서 혼자서 자기 손에 맥주를 뿌리며 1인 맥주 세레머니를 벌이는(...) 장면이 포착되며 웃음거리가 되는 등 오치아이를 부당하게 몰아낸 대가를 제대로 치르게 되었다.
이후 일본시리즈에서는 아쉽게도 3승 4패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우승을 내주며 호크스의 가을야구 저주[52] 를 끊어줬고, 그렇게 감독으로써의 마지막 지휘를 끝내며 8년 간의 주니치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 불릴 만한 커리어를 마무리지었다.
감독으로서의 마지막 경기였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2011년 일본시리즈 7차전에서 패배한 후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오치아이.
4. 프런트로서 주니치 복귀[편집]
2011년 오치아이를 몰아낸 주니치 프런트는 1992-95시즌에 감독을 역임했었던 팀 레전드 타카기 모리미치를 재차 감독으로 불러 기존과는 다소 이색적으로 팬서비스를 적극 강조하는 등 오치아이 색채 지우기에 나섰다. 그러나 타카기는 10.8 결전과 이듬해 성적부진으로 인한 도중퇴임 등 감독으로써는 이미 한참 전에 한계가 드러났었던 인물이었고, 재차 감독으로 취임한 후에도 팬서비스를 강조한 것과는 정반대로 경기 도중 자신을 비판하는 팬과 말다툼을 벌이거나 이바타 히로카즈를 비롯한 선수, 코치진과 불화를 일으키며 수 차례 돌출발언을 내뱉는 등의 여러 논란으로 팬들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이런 인물을 무려 17년만에 감독으로 복귀시켜서 오치아이 재적 당시의 성과가 '오치아이의 능력이 아니라 선수 구성을 잘 한 프런트의 능력'임을 증명하려 했으나, 타카기의 감독 복귀 2년차인 2013년에 팀은 2001년 5위 이후 12년만의 B클래스(4위)라는 치욕을 겪으며 오치아이 시기의 최전성기를 잊지 못하던 팬들에게 거세게 비판을 당했고 관중수가 오치아이 시절보다 더 줄어드는 등 팬심 이탈이 도리어 가속화되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결국 2013년 시즌이 끝나고 타카기 모리미치 감독의 사임과 함께 오치아이 퇴임을 주도한 프런트는 모조리 물갈이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주니치의 감독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세간의 추측에 뒤통수를 날리면서 주니치 구단의 GM으로 팀에 복귀하게 된다. 감독자리에는 포수인 타니시게 모토노부를 선수 겸 감독으로 선임하고 2013년 시즌오프의 연봉협상으로써 GM업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연봉협상자리에서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연봉 삭감조치를 취하면서 또다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주전 유격수 자리를 지켜오던 베테랑 이바타에게 75%가 넘는 연봉삭감을 통보하면서 자진 퇴단하게 만든 것[53] 을 시작으로 주전급 대부분이 25%이상의 연봉삭감을 피하지 못했으며, 2013시즌 36세이브를 올린 이와세 히토키조차 겨우 연봉 동결 통보를 받을 정도. 그나마 이와세의 연봉 동결이 가장 후한 대우였다(...)
신기한 것은 이러한 연봉삭감의 칼바람속에서도 예년 같으면 반발에 계약보류를 선언했을 대부분의 선수들이 협상 테이블에서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군소리 없이 도장을 찍고 나왔다는 거. 일본시리즈가 끝나자 마자 일본 스포츠 신문의 지면을 장식하는 게 그날의 주니치의 연봉협상 결과일 정도로(...) 프런트로서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팀은 2014년에 성적 폭망(...). 연봉만 잘 깎았지 팀이 나아진 게 없었다. 노쇠화된 타선에 얇아진 투수진. 본인이 감독을 했을 때 매년 1위 아니면 2위였던 팀은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조차 힘겨운 상황으로 추락했고 결국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게 겨우 1게임 차로 4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 때는 아직 단장 1년차라 일부에서는 일단은 본인이 감독을 맡던 동안 전성기를 달리면서 과도하게 부풀어오른 선수 연봉 지출을 줄이는 데 집중하면서 장기적인 안목에서 구조조정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2015년에 들어와서는 다른 팀이 조금이라도 1위자리에 접근하면서 한때나마 우승을 노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 대 혼전의 와중에도 아랑곳 없이 나홀로 밑바닥을 기어다니면서 팀을 지렁이가 된 용으로 만들고 있다. 감독시절 과감한 개혁행보와 선수기용으로 팀의 전성기를 이끈 명감독의 실적과 선수보는 안목을 믿고 오치아이의 프런트 복귀를 지지했던 팬들도 다카기 시절보다 더 나빠진 팀사정에 서서히 등을 돌리기 시작하고 있다. 감독시절 틀을 깨는 선수기용으로 놀랄만한 성과를 내던 과거와는 달리, 단장이 되어서는 야마모토 마사, 타니시게 모토노부, 와다 카즈히로, 카와카미 켄신, 이와세 히토키 등 자신이 감독시절 총애했던 40이 넘거나 내일 모레가 회갑인 베테랑들에게 유독 집착을 하고 있다. 처음에 연봉 삭감의 폭풍이 몰아칠 때는 연봉만 많고 기량이 떨어진 베테랑 위주의 팀에 대한 구조조정과 과다하게 부풀어오른 연봉총액 축소를 위한 행보라고 생각했으나 정작 연봉 삭감에 반발하여 요미우리로 떠난 이바타 히로카즈를 제외한 나머지 베테랑들은 연봉만 깎였지 여전히 팀에 잔류해서 주전급으로 뛰고 있고, 베테랑 우대에 찬밥만 먹다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팀에서 방출된 중견급 선수들이 타 팀으로 이적해서 성과를 내고 있다. 2014년 시즌 후 방출시킨 요시카와 다이키, 야나기타 시게오가 이듬해 친정팀을 상대로 적시타를 치니까 '왜 방출시켰냐'라는 볼멘소리가 나왔었고, 정작 그렇게 싸고 돌아서 팀에 잔류한 베테랑들은 노쇠화, 부상 등으로 이렇다할 성적을 못내면서 팀의 발목을 잡고 침체화를 가속화 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드래프트에서도 장기적 안목으로 선수를 지명하는 게 아니라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대졸, 사회인 출신의 소위 즉시전력감 위주로 뽑았지만 그렇게 뽑은 선수들은 2군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뽑아놓고는 기회도 제대로 못 받았는데 성과가 없다면서 연봉부터 깎는 행보를 보이는 등의 행태로 진짜 즉시 전력감이라고 할 수 있는 우수한 대졸선수들이 주니치행을 기피하는 움직임까지 나오는 등 미래마저 어두운 상황에 팬들의 분노 게이지가 점점 상승 중에 있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지명한 2014년 드래프트는 주니치 드래프트 역사상 최악으로 꼽힌다[54] . 이 드래프트로 뽑은 선수 모두 2022년 기준 주니치에 없으며, 야마사키 야스아키를 거르고 노무라 료스케(野村亮介)[55] 라는 투수를 지명한 건 두고두고 삽질로 회자된다.
구조조정에서 비용절감만이 능사가 아니다라는 교훈을 스포츠에서 보여주고 있는 실제 사례.[56]
또한 일본의 평범한 야구인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주관과 개성이 감독 시절에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해서 팀의 성공으로 연결됐다면 단장이 되어서는 그러한 점이 도리어 부정적으로 작용해서 팀내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는 것도 감독의 리더쉽과 단장의 리더쉽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팀이 1970년 이후 45년만에 3년연속 B클래스를 기록하자 2015년 시즌 종료 후 야마모토 마사를 비롯한 40대 이상의 노장선수들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작업에 들어가서 선수 겸임이던 다니시게는 선수에서 은퇴시키고 감독에만 전념하게 했으며 이와세를 제외한 대부분의 노장들은 은퇴 내지는 방출을 통해서 옷을 벗겼다.
2016년 팀은 전반기 동안에는 예상을 뒤엎고 요미우리, 요코하마
그리고 타니시게 모토노부도 시즌 도중 휴양을 선언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는 일본프로야구에서 시즌 도중에 감독을 해임하기 직전에 취해지는 조치로 실질적으로는 해임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타니시게 감독이 본인의 감독시절에 상당히 신임을 하던 주전포수였고 본인이 GM으로 취임하면서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앉힌 감독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코칭스태프 구성을 놓고 타니시게 감독과 첫해부터 충돌하면서 삐그덕거리더니 결국은 이 사달이 났다. 역시 프런트론 무능하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구단 안팎에서 시즌 종료후 해임설이 나도는 가운데 급기야는 일부 과격한 팬들이 나고야 돔에 "오치아이는 물러나라"라고 쓰여진 피켓을 가지고 들어와서 항의를 하는 모습까지 보이는 등 점점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몰리고 있는 상태이다. 본인이 GM으로 재직한 3년동안 팀을 재건하기는 커녕 자신이 앉힌 다니시게 감독과 마찰을 빚는 등 갈수록 나빠지는 모습만 보이면서 꿈도 희망도 점점 사라지고 팬심마저 떠나기 시작하고 있으니 해임돼도 변명의 여지는 없을 듯.
결국,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2017년 1월 퇴임한다는 기사가 떴다.# 이렇게 본인의 흑역사로 확정되며 아름답지 못한 말년을 보냈다고 적히게 생겼다(...) 그리고 그 뒤로도 주니치의 비밀번호는 3시즌을 더 가서 2020년에야 겨우 비밀번호를 탈출했다.
결국 '프런트' 오치아이의 실패는 프런트와 현장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비슷한 예로는 NBA의 레전드급 선수였지만 행정가로서는 실패했던 아이제아 토마스가 있고, 정반대의 예로는 선수 시절 성적이 그럭저럭이었으나 프런트로서 우수한 능력을 보여주었던 보스턴 레드삭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시절의 제리 디포토가 있다. 하지만 감독, 프런트 대빵으로 둘다 성공한 케이스가 있기는 하다.
5. 플레이 스타일[편집]
5.1. 타격[편집]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우타자로 비범한 타격 센스는 프로에 들어오기 전부터 인정 받아 왔다. 다만, 오치아이가 가지고 있는 '신주 타법'이 프로에서는 통용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였고 이에 대해 당시 롯데 감독이었던 야마우치 카즈히로[57] 가 수차례 스윙 수정을 가하려 했었다. 야마우치의 스윙론에 동의하지 못한[58] 오치아이는 "잘려도 본인이 잘리는 것이니 스윙에 대해서는 이제 지도를 하지 말아 달라."라는 당돌한 요청을 한다.
같은 팀 내의 '도이 켄지'의 스윙을 보고 힌트를 얻은 오치아이는, 프로의 빠른 공에 금새 적응 하였고 당초 약점으로 보여 졌던 인코스 높은 볼에 대한 대응력이 좋아지며 비약적으로 장타가 늘기 시작했다. 이 후 에나츠 유타카의 조언에 따라 배터리의 볼 배합을 읽는 능력을 키웠고 이로 인해 역대급 재능이 개화 하게 된다.
통산 11회 3할을 돌파했으며, 통산 출루율이 4할 2푼대에 통산 BB/K이 1.29개인 것으로 알 수 있듯이 단순히 홈런만 많이 치는 장타 원툴 공갈포가 아닌 선구안도 뛰어난 완전체 타자였다. 최전성기인 85~86시즌에는 사사구는 120여개나 얻어 가면서 삼진은 고작 40 ~ 50개 밖에 당하지 않았다. 나가시마 카즈시게가 요미우리에서 동료로 뛰며 "타격 후 배트가 부러진 것을 본 적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배트 중심에 공을 맞추는 능력이 뛰어 났고, 이런 비범한 능력을 바탕으로 500호 - 1000호 - 1500호 - 2000호 안타를 모두 홈런으로 기록하는 기이한 기록까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롯데 시대에는 타격 케이지까지 들어 온 카메라 맨에게 "위험하다"고 경고했으나 해당 카메라 맨이 꿋꿋이 촬영을 지속하자 경계심을 늦추지 말라는 의도로 "자, 그럼 거기 향해서 쳐 볼께"라고 한 뒤 날아 온 초구를 정확히 밀어쳐 방송 카메라의 렌즈를 깨 버린 적도 있었다.[59]
우측으로 밀어치는 것은 거의 예술적 경지로, "홈런 타자 = 당겨치기"의 이미지가 강하던 시절에 오치아이가 등장함으로써 신선함을 주었다는 평가가 많다. 통산 510개의 홈런 중 170여개의 홈런을 밀어쳐 쳤다고. 밀어치기의 이미지가 강해서 투수들은 인코스 승부를 많이 했는데 오치아이는 내심 '아웃 코스에 약점이 있다'라고 스스로를 판단했기 때문에 인코스 승부를 들어 올 때마다 내심 기뻤다고 한다.
찬스에도 매우 강해, 일본 통산 타율 기록의 기준인 4000타수 이상 선수들 중 통산 득점권 타율이 .334나 된다. 본인의 통산 타율인 .311보다 2푼 이상 높은 수치. 특히 3관왕 시즌이였던 1985년에는 득점권 타율이 무려 .495였다.
오치아이 타격 영상
바늘구멍을 통과한다는 정교한 제구력을 자랑하던 히로시마의 투수 키타벳푸 마나부에게 유독 강했다. 키타벳푸는 주니치에게 유독 강한 투수였으나 오치아이와의 대결에서는 좀처럼 이기지를 못했다. "키타벳푸의 공은 기다리면 반드시 온다니까"말을 남겼으며 야구팬들이 보기에 이 두 사람은 "몇 cm, 몇 mm의 싸움을 하고 있구나"하고 느낄 정도로 투구명인과 타격 명인의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참고로 오치아이가 주니치 이적 후 센트럴리그 제1호 홈런 허용투수는 키타벳푸다.
다만 일본시리즈에서는 정규시즌만큼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진 못했는데, 비율스탯 자체는 타율 .286/출루율 .457/장타율 .343/OPS .800으로 나쁘진 않았고 일본시리즈에서도 준수했던 선구안을 빛냈지만 상대팀 투수들의 연달은 견제와 본인의 노쇠화 등으로 인해 타격이 저하되며 홈런은 단 1개도 못 쳤고, 타점도 마지막 진출이었던 1996년 일본시리즈 1차전에서 기록한 1타점에 그치는 등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을 거뒀다. 정작 선수 시절 유일한 우승이었던 1994년 일본시리즈에선 10.8 결전에서 입은 사타구니 부상 때문에 3차전에서만 출장했던 것도 아이러니.
5.2. 주루[편집]
오치아이의 능력 중에서 가장 평가 받지 못하는 편이지만 최대한 공격적으로 주루를 했던 편. 1루에 슬라이딩 하는 선수에게 공개적으로 "멍청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1루에서의 슬라이딩은 부상 당하기 쉽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5.3. 수비[편집]
데뷔 당시에는 2루수였으나 본래 프로 입단 전에는 3루수. 살아 남기 위해 2루에서 적응했다고 한다. 첫 타격 3관왕 시즌도 2루수 일 때 이루었다. 이 후 1루수 그리고 3루수로도 출전했는데 팀이 원할 때 그에 맞춰 포지션을 변경하였다. 최대 출전 포지션은 1루수. 다만 수비 쪽은 타격 쪽에 비해 돋보이는 요소가 없었던지, 골든글러브 수상경력은 1번도 없었다.
이 때문에 통산 510홈런을 기록했지만 어떤 내야 포지션에서도 포지션별 최다 홈런 기록을 갖고 있진 않다. 1루수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그분이나 키요하라 카즈히로 때문에 이미 탈락이고.. 3루수는 기누가사 사치오의 504홈런을 최고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그나마 남아있는 2루수조차도 6~80년대 도쿄/롯데 오리온즈,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활약한 바 있는 야마자키 히로유키의 270홈런[60] 을 최다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6. 연봉[편집]
한 동안 일본에서 '프로야구 선수의 연봉' 혹은 '연봉'이라고 하면 무조건적으로 딸려 나오는 이름 중 하나가 오치아이였다. 매년 연봉 협상으로 세간의 주목을 끌었으며 언제나 프런트와의 연봉 협상 기간 중엔 말 그대로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본인의 실력으로 연봉 기간에 나온 모든 잡음을 지웠고, 독특한 언동으로 꾸준히 매스컴의 요주의 인물로 다루어 졌기 때문에 프런트 측에선 좋던 싫던, 구단명이 늘 노출되는 효과 또한 있었다.
1987년 주니치에 이적하면서 1억엔을 넘는 최초의 선수가 되었고, 이 후 10년 간 일본 연봉 최고 순위에서 이름이 빠지지 않았던, 이 부분의 전설의 레전드이다.
오치아이의 시즌당 연봉은 아래와 같다.
- 1978년 - 드래프트 3위로 입단(계약금 2700만엔)
- 1979년~1980년 - 360만엔
- 1981년 - 540만엔
- 1982년 - 960만엔
- 1983년 - 1600만엔
- 1984년 - 5400만엔
- 1985년 - 5940만엔
- 1986년 - 9700만엔
- 1987년~1989년 - 1억 3000만엔
- 1990년 - 1억 6500만엔
- 1991년 - 2억 2000만엔
- 1992년 - 3억엔
- 1993년 - 2억 5000만엔
- 1994년~1996년 - 3억 8000만엔
- 1997년~1998년 - 3억엔
그래도 무조건 연봉을 올려달라면서 고집만 부리지는 않았다. 1993년에 한번 연봉이 삭감되었는데 이 해에 타율 2할9푼2리, 22홈런, 71타점으로 본격적인 기량쇠퇴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61] 실제로 이 이후로 오치아이는 커리어에서 두번 다시 시즌 22홈런 이상을 치지 못했는데 팀에서 삭감된 연봉을 제시했을 때 "못했으니까 깎이는 게 당연하다"면서 별다른 마찰없이 도장을 찍었다.
그 후 1996년 시즌 오프, 자유계약을 신청해 요미우리에서 방출되었을 당시 누가 봐도 오치아이는 고령으로 인한 노쇠화와 부상 등으로 전성기가 한참 지난 상태였기 때문에 닛폰햄 파이터즈 측과 계약 당시 교진군 시절 연봉인 3억 8천만엔에서 8천만엔이 삭감된 3억엔을 연봉으로 제시받았고, 그 후 은퇴 때까지 계속 3억엔 연봉을 유지했다. 그러나 닛폰햄에선 노쇠화로 인한 저조한 성적으로 먹튀행을 피하지 못했다.
7. 연도별 성적[편집]
8. 어록[편집]
어찌 보면 '허세'로 느껴지는 발언을 하여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일관적이며 나름의 뚜렷한 철학을 바탕으로 발언한다. 상대를 무시하거나 하는 발언이 아닌, 자신에 대한 명확한 성찰이 있어야 가능한 발언들이 대부분.
선수 - 감독 시절의 인상적인 발언을 몇 개 들춰 보자면,
그 녀석이 못 잡으면 아무도 못 잡는 거야.
ㅡ 2004년 세이부와의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 당해년도 골든 글러브 수상자인 쿠라모토 히데노리의 히 드랍 더 볼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너무나 평범한 뜬공을 실책했고 이것이 이유가 되어 1차전을 상대에게 넘긴 상황에서의 발언이었다.
나는 매스컴에 선보이기 위한 연습은 안 시켜. 어떻게 해야 이 팀을 강하게 만들까... 밖에 생각하지 않아. 팀을 맡은 이상, 나의 방식대로 팀을 이끈다. 주변에서 뭐라 하든 난 관심도 없고...
ㅡ 감독 취임 후 첫 스프링캠프 중에 했던 발언. 본인의 야구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발언이자 감독 생활 내내 차가웠던 매스컴과의 관계의 시작이기도 했다.
'타이틀이 갖고 싶다'라는 마음으로는 안된다. '타이틀을 따낸다!'라는 강한 마음 만이 타이틀 쟁취의 첫 걸음이다.
ㅡ 선수 시절 늘 '3관왕 선언'을 했던 이유에 대한 답변
그런 마음에도 겨우 3번 밖에(?) 못했... 다며 아쉬워 했다
느린 공을 때려 낼 수 있는 타자라면 빠른 공도 얼마든지 쳐낼 수 있다.
ㅡ 흥미롭게도 스즈키 이치로도 같은 타격 지론을 가지고 있다.
"너, 상 받기는 다 틀렸네... 그렇다면 노모에게도 상 받게 해줄 수는 없겠구만...."
ㅡ 1990년 올스타전 2차전이자, 최초의 신인 선발 대결로 관심을 모은 주니치의 요다 츠요시와 긴테츠의 노모 히데오의 경기 중에 한 말. 그리고 다음 타석에 노모에게서 홈런을 쳤다.
ㅡ 요다가 퍼시픽리그 4번타자 키요하라 카즈히로에게 2점 홈런을 맞자 한 말. 오치아이가 노모에게서 홈런을 빼앗은 덕에 두 거물 신인의 선발 대결은 무승부가 되었다.[64]
연습 때 안 되던 기술이 시합 때 될 리가 없지. 연습 때 되었다 해도 시합에서 안될 수도 있고. 시합 때도 된다면 그 기술은 엄청 높아진 거라구.
결점을 고친다는 것은, 장점을 잃는다는 의미도 되지.
이 멍청한 놈아, 부상당하고 싶냐!!!
ㅡ 닛폰햄 시절. 1루 슬라이딩 등 부상을 무서워 않는 과격한 플레이로 유명했던 히로세 테츠로에게 일갈했던 말. 1루 슬라이딩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아니, 은퇴했어?라는 말이 나오도록, 화려한 세리모니 없이 조용히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요.
ㅡ 선수 생활 말년, 은퇴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며. 그리고 위에 나오듯이 본인의 의지대로 조용히 그라운드를 떠났다.
요새 젊은 친구들은 사람 눈치를 많이 보더라구. 내 표정에 의해 안심도 했다가, 불안해하기도 했다가... 그래서 차라리 무표정으로 있는 거에요. 자기들이 싸울 상대는 반대편에 있는데, 안에 있는 사람 눈치 봐서 어떻게 싸우겠다는 거야. 늘 선수들에게 말해요. "싸우는 상대를 착각하지 말라구"
ㅡ 덕아웃에 앉아 언제나 무표정으로 있는 이유에 대해 묻자.
그러면서 은근히 호시노를 깠다...
체력과 기술이 제일 중요하지... 정신력이라는 것은, 이 2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딸려오는 거야.
ㅡ 감독 은퇴 직전 있었던 에가와 스구루와의 인터뷰 중 "야구를 잘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40홈런을 쳐 주는 선수가 귀중한 전력이라면, 보내기 번트 성공율이 100%에 가까운 선수 또한 귀중한 전력이다.
기본에 충실했고, 상식적인 것을 상식대로 했다. 보는 쪽에서야 재미없었을지 몰라도, 그것이야말로 실력 상승의 지름길.
ㅡ 감독 은퇴를 앞두고 팀을 꾸준히 A클래스(리그 3위 이상)로 이끌었던 이유에 대해 묻자.
열심히 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프로라면 결과가 나오도록 잘 해야 한다. 아마추어가 아니니까.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모든 걸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감독. 감독이 라인업표에 이름을 쓰지 않으면 선수는 출전할 수 없으니까.
선수회로써 열심히 싸워라. 리그 우승이나 일본 시리즈가 없어져도 상관없다. 세상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
ㅡ 2004년 NPB 파업[65]
당시 주니치 선수회장 이바타 히로카즈에게 파업을 독려하며.[66]
9. 이야깃거리[편집]
- 스스로 매스컴에 밝히고 있지만 일본 야구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한다는 건덕후다. 방송 등에서 꽤나 진지하게 건담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걸 보면 내공이 장난 아닌 듯. 실제로 주니치 감독 시절 감독실에 건담 큐리오스 포스터를 붙여 놓기도 했고, 2008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요미우리의 메이크 레전드 표어에 대해 그럼 우리 캐치프레이즈는 트란잠이라고 선언했을 정도다.[67] 또 자신의 기념관에 건프라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이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건프라들 중 절반은 오치아이 자신이 직접 만든거라고 한다.#
2008년 1월 15일 시즈오카 하비 센터에 방문했을 때의 사진. 이 날 오치아이는 반다이로부터 주니치 드래곤즈 팀 색깔과 같은 색의 건담 엑시아 건프라를 선물받았다. 덧붙여서 오치아이가 입고 온 재킷 색깔은 건담의 인기 캐릭터 샤아 아즈나블의 유니폼 색깔과 같은 레드와인 색이었다[68]
- 명구회 가입조건인 2000안타 이상을 쳤지만 명구회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2000안타-200승에 도달하지 못한 수많은 대스타들을 배려하기 위해서라고라고는 말했지만 실제로는 명구회에 등록된 선배선수들(특히 명구회의 수장격인 가네다 마사이치)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라는 점과, 오치아이 자신이 명구회에 속하는 것을 그리 안 좋게 생각해서 가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현역시절 이야기로 몇 개를 꺼내 본다면 빈볼에 맞자 이후 타석부터 잇달아 상대 투수를 향해 직격 타구를 날려 투수를 공격하는 것으로 혼쭐을 냈다. 그리고 베이스에 나가서 씨익 웃었다고 한다.[69][70]
- 아울러 500호-1000호-1500호-2000호 안타를 모두 홈런으로 기록했다. 1000경기, 2000경기 때도 홈런을 쳤다. 한번은 어느 기자가 "기념 안타들이 전부 홈런인 걸 알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당연하지. 노리고 쳤으니까."라고 대답했다.
- 프로 입단 이후에는 배탈이 날 수도 있어 좋아하는 생선회를 일절 입에 대지 않았고, 아들은 마당에서 나는 스윙소리에 잠이 깨거나, 원정경기에서 동료가 호텔방을 방문하면 나체로 스윙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 와카야마현에 오치아이 히로미츠 야구 기념관이란 본인의 기념관을 만들었다. 집에 트로피나 기념품이 너무 많이 쌓여서 처치곤란(골프공 넣는 통이나 동전 저금통으로 썼다고) 도중에 부식이나 여러 문제 때문에 기념관을 만들었다. 이곳 1층에 자신의 팬티만 입은 모습을 브론즈 상으로 만들어 놓은 게 있다. 참고로 2층에도 석고 상으로 하나 더 만들어 놓았다. 아내 말로는 그의 육체미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 20대에 한 번 결혼했다가 이혼한 후에 현재의 아내인 9살 연상의 오치아이 노부코와 재혼했다.엄청난 공처가로도 유명하다. 아내의 말에는 깨깽하면서 기어들어간다고. 그러나 대시는 오치아이가 굉장히 적극적으로 했었다. 자신에게 담담하게 신뢰를 보내는 것을 보며 한눈에 반한것. 그리고 아내의 일은 본인이 굉장히 적극적으로 도와준다고 한다. # 참고로 노부코 여사는 남편을 어린아이 취급할 정도로 기가 쎄기로 유명한데 노부코 여사의 저서인 "악처가 좋은 남편을 만든다."[71] 를 보면 남편 조련의 끝장을 보여준다. 그녀가 남편을 부르는 애칭은 히로. 아래에 설명할 등번호 관련 일화도 그녀의 기쎈 성향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
- 현역 시절 등번호 6번에 관한 집착이 굉장히 강했다. 롯데와 주니치 시절부터 항상 등번호 6번을 고수해 왔고, 요미우리 이적 당시에도 등번호로 6번을 달고 싶어했다. 이때의 일화로 요미우리의 6번은 구단 사상 최고의 2루수로 칭송받는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시노즈카 카즈노리가 달고 있었기에 아무리 통산 성적이 넘사벽이다 해도 요미우리 입장에선 외부 이적생인 오치아이에게 시노즈카의 6번을 쉽게 내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직접 나서서 다른 번호를 달면 안 되겠느냐고 사정을 했지만 오치아이는 "순순히 등번호 6번을 내놓는다면 내가 주니치에 잔류하거나 요미우리가 아닌 다른 팀으로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란 태도로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나가시마는 오치아이의 아내인 노부코 여사에게 SOS를 쳤는데, 이 노부코 여사가 나가시마 감독의 광팬이었다. 나가시마는 노부코 여사와 통화 중에 "정 안 된다면 영구결번된 내 등번호인 3번이라도 줄 수 있다."며[72] 오치아이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고, 이에 노부코 여사는
"오늘 중으로 배번선택을 완료시키겠다. 하지만 감독님의 3번은 절대 안 된다."
- 선동열이 일본진출 이후 한이닝 2피홈런을 허용할 당시, 2번째 홈런의 주인공이 오치아이 히로미츠이다.[77][78][79] 참고로 선동열 야구인생에서 한이닝 2피홈런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 주니치 감독을 물러난 뒤 2012년 7월. 뜬금없이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게임에서 오치아이 부모와 아들과의 대결이라는 타이틀로 출현하였다. 실황야구가 일본 내에선 최고의 인기게임이긴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게임광고에 출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팬들의 입장.
- 현역 시절의 인기를 활용, 가수로도 활동한 바 있다. 물론 앨범을 냈다고 가요 프로그램에 꾸준히 얼굴을 내진 않았지만, 프로 가수와도 듀엣을 하고, 본인 와이프하고도(노부코 상) 노래 하는 등 꾸준히 가수로써의 활동은 했다. 주니치 감독을 그만 둔 뒤 무려 "골든 베스트 오치아이 히로미츠"라는 베스트 앨범이 나왔을 정도. 기본적으로 아마추어 치고는 상당한 가창력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고, 3번째 타격 3관왕이 된 후 본격적으로 데뷔, 첫 싱글이었던 사무라이의 길(サムライ街道)은 5만장이나 팔리며 나름 성공한 데뷔 싱글이 되기도 했다.
충격적인 베스트 앨범
- 지명타자 제도를 매우 싫어하고,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통산 2236경기 중 지명타자로 출전한 경기는 통산 17경기에 불과하며, 선수생활의 말년을 지낸 닛폰햄 파이터즈 시절에는 당시 감독이었던 우에다 토시하루가 지명타자로 출전해 타격에 전념할 것을 권유했으나, 이를 완강히 거부하며 단 한 차례도 지명타자로 출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닛폰햄 시절엔 주로 1루수로 출장했다.
- 몸관리에 온갖 공을 들였지만, 의외로 타격 시에는 배팅장갑을 끼지 않고 맨손으로 스윙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장갑을 끼면 정타를 때렸을 때 특유의 손맛(?)이 살아나지 않는 느낌이 들어서 장갑을 끼지 않고 맨손으로 스윙을 했다고 한다. 비슷한 이유로 맨손으로 스윙한 선수가 블라디미르 게레로가 있다.
- 팬 서비스가 굉장히 안 좋은 일본프로야구 선수 중 하나이다. 주니치 감독 시절 "이기는 것이 최고의 팬 서비스"라는 말을 공공연히 할 정도로 야구 이외에 다른 것은 일절 고려하지 않는 성격인지라...
- 최근에는 유튜브를 시작하였다. 제목은 자신의 별명을 따서 오치아이 히로미츠의 오레류 채널.